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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리 상반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발표
admin - 2003.02.27
조회 5438

용인 서리 상반 고려백자요지 발굴조사 발표  

style=”font-weight: bold; color: black;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중고딕; text-align: justify”>face=굴림체 color=#033cac>국가사적으로 지정할 만한 발굴 성과 거둬…. style=”font-weight: bold; color: black;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중고딕; text-align: justify”>face=”굴림체” color=”#033cac”>▶향후 유적지 정비 및 복원 계획을 수립 관광 및 교육자원으로 활용계획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은 용인시 향토유적 제45호(1997년 12월 10일 지정)인 용인 서리 상반 고려 백자 요지에 대한 1ㆍ2차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각종 요도구

이 도요지는 국가사적 제329호인 이동면 서리 중덕 마을의 고려 백자 요지와 함께 우리나라 도자사에서 자기 생산 남상(濫觴, 사물의 처음이나 시작을 일컬음)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학계의 주목을 크게 받아 왔었던 것으로 유적지 정비를 통해 학술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발굴조사는 1ㆍ2차로 나뉘어 유적의 범위와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간단한 발굴로 진행되었는데, , 그 조사성과는 다음과 같다.

유구로는 고려백자가마가 최소한 2기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가마제작에 사용되었던 벽돌편이 다수 수습되어 가마 구조가 전축에서 토축으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초기의 중국식 전축가마에서 한국식 토축 가마로의 전환이 이 유적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가마 부속 유구로는 도자 생산에 따른 폐기물을 버린 퇴적구가 조사되었는데, 그 규모가 길이 72m, 폭 42m, 높이 2m의 거대한 크기임이 밝혀져 앞으로의 조사에 큰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 공방시설 혹은 도공들이 살았던 주거시설로 추정할 수 있는 석렬 유구 2기와, 폐기구덩이 1기, 성격미상 유구 2기가 확인되어 당시 도기생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 백자로서 완, 발, 접시, 잔, 종지, 대발, 호, 합, 병, 뚜껑 등의 일상용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향완ㆍ보ㆍ궤 등 대형의 백자제기와 백자로 만든 항아리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수습되어 당시 고려백자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확인되었다. 특히 가마 안에서 화력을 감식하기 위한 ‘색견’편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명문자기(사진 참조)와 다량의 요도구들이 발견됨으로써 이 시기에 자기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였음이 확인되어 고려시대 자기연구에 귀중한 고고학적 정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번 조사는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를 위한 예비적 성격의 간단한 발굴조사로서 가마의 전반적인 규모와 형태를 파악할 수 없었고 퇴적구도 부분적인 조사만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만으로도 경기도 기념물 혹은 국가사적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충분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용인시는 본 유적에 대한 연차적인 정밀 발굴조사를 계획해 둔 상태이며, 그 결과에 따라 유적지정비 및 복원계획을 수립ㆍ추진하여, 관광 및 교육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위와 관련한 문의사항은 김성태 연구실장031-258-5105(교 411)으로 연락하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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