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경기문화재단 사이버백일장 수상자 ♣ 심사결과
♣ 심사위원
식민지 시대의 명문장가 이태준이 쓴 수필 <필묵>은, 만년필의 편리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랬어버린 것, 그것은 바로
“가장 운치 있고 가장 정성스러운 문방우(文房友)”인 붓과 먹이다. 그의 생각에, 그것들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다. 그는
“촉 긴 붓과 향기로운 먹만 있으면 어디서든 정토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그 글을 만년필로 썼다. 아마 그는 만년필을 쥔
손을 보면서 삶의 여유를 점점 잃어가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만년필조차 까마득한 기억
저편으로 보낸 첨단문명 시대를 살고 있다.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폰 숫자판이 만년필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런 천이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없지 않다. 이태준이 말한 운치와 정성도 그 속에 들어갈 것이다. 인터넷 문명이 속도와 양과 시공간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우리가 사는 삶의 한 구석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터. 이번 사이버공모는 말 그대로 가상공간에서 벌어진 백일장이었다. 날을 잡아 수많은 참가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저마다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내던 백일장을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 편리한 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아쉬운 점 또한 없을 수 없었다. ‘시제(詩題)’를 기다리는 참가자들의 잔뜩 긴장된 표정도 볼 수 없었으며, 흘깃흘깃 남의
글솜씨를 곁눈질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글쓰는 것은 아예 포기한 채 그날 하루 모처럼의 나들이를 마냥 즐기는 주부의 모습이나 일찍 글을
써내고서는 나무그늘 아래 앉아 릴케 시집을 뒤적거리는 예쁜 여학생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사이버 백일장에 참가한 응모자들의 태도가 어떠했겠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 하나 문자메시지를 ‘날리듯’ 가볍게 글을 쓰지 않았으며, 모든 참가자들이 먹먹하기만 할 컴퓨터 화면을 원고지처럼 소중하게 바라보며, 글을 썼을 것이다. “방가 방가” “*^^*”
“으아아아∼∼” “4랑海요”라는 식의 통신언어나 외계어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응모한 이들 중에는 매일매일
어슷비슷한 일상을 꾸려나가야 하는 주부들이 당연히 제일 많았는데, 그들에게 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자기성찰과 반성, 그리고 재충전의 기회이자 통로였을 것이다. 『심사결과, ‘7월7일 칠석을 전후하여’라는 단서 때문인지
응모작 중에는 만남과 인연을 소재로 한 것이 꽤 많았고, 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인 글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부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그려지는 일상의 모습이 다소 단조롭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지천명이 가까운 나이에 미국에 유학간 딸과 인터넷을 통해
매일같이 만나는 한 수상자의 글에서 보다 쉽게, 새삼 우리가 사는 시대의 달라진 일상풍속도도 엿볼 수 있었다. 공모전에 관심을 둔 선생님의
열정으로 동아리 중학생들이 대거 참가한 것도 이채로웠다.』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모든 응모작들을 다 읽고 나서 각기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김은희의 <물고기에게 배운다>를 대상으로 뽑았다. 남편과 아이들을 내보내고 난 뒤 주부가 맞이하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의 일상을 차분하게 정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소담하게 그려냈다. 가계부를 정리하다 행방이 묘연했던 500원의 출처를 기어이 알아낸다든지,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소변을 제대로 맞춰서 누지 못하는 아들녀석에게 용돈 삭감이라는 처방을 또 다시 고려한다든지 하는 부분에서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특별한 기교나 과장 없이 범박한 일상을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점이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공모전이 다른 백일장과 달리
문학적 재주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본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대상작으로 확정하는 데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다른 수상작들도 등수와 상관 없이
높은 수준의 글솜씨를 보여주었고,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마음을 잘 드러냈다. 어쨌거나
사이버 공간도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새삼 발견한 게 이번 공모전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하겠다.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란 마냥 빠르게 앞을 치고 나아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필요에 따라 정신 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도 문득 책상을 벗어나 하늘을 한 번 쳐다볼 수 있는, 어느 하루는 아예 컴퓨터 근처에도 가지 않고 지내보는, 이왕 그런 마음이
들었거든 아예 책상 서랍 속에서 먼지만 묻히고 있을 예쁜 꽃편지지를 꺼내 편지를 쓰는 여유…그런 여유들이 오히려 진정한 자기발전의 크나큰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번 사이버공모전이 많은 이들에게 그런 여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로 작용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입상자에게는 축하를, 열심히 글을
써서 보냈지만 등외(等外)로 밀린 응모자들에게는 내년에 다시 한번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심사위원 김남일, 김윤배, 정수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