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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와 성곽의 다양성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의 가치_이기봉
admin - 2011.11.04
조회 5534

<소개말>

1960년대부터 중공업과 경공업이 선진국에 함께 있지 못하는 공간적 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1980년대부터는 고부가가치를 추구하는 지식정보산업의 등장과 냉전체제의 붕괴 등에 힘입어 세계경제체제가 새롭게 요동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1900년대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도저히 발전하지 못할 것 같은 많은 후진국들이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약진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제는 세계가 여러개의 복합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무한경쟁의 유동적인 시스템을 갖게 되었다.세계경제의 변화와 함께 근대의 발전론적 역사관에 대한 반성도 이루어졌다.

그 동안 경제적 궁핍이나 전쟁의 혼란 등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많은 나라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자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세계에 속속 소개되면서 세계문명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공급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의 문명사는 어느 문명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더 찬란했다거나 우수했다는 식의 절대적 관점이 아니라 세계문명사와 세계문화유산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느냐의 상대적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냉전체제의 가장 큰비극 중의 하나였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로 떨어졌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시작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2011년 현재 경제 규모의 측면에서 남한만으로 세계 제15위, 인구 규모의 측면에서 남한 약 5,000만 명과 북한 약 2,300만 명을 합한 약 7,300만 명의 작지 않은 국가가되었다.한국은 2,500년 이상 세계문명의 보편성을 담지하면서도 다양성 역시 풍부하게 담고 있는 역사를만들어왔고, 비록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급속한 경제발전 등을 거치면서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직도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주목은 그 동안 경제적 궁핍 때문에 세계문명사에서 소외되어 왔던 많은 나라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세계문명사와 세계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본 발표에서 주목한 한국의 성곽 역시 세계의 어떤 국가나 문명권 못지않게 다양한 유형의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문헌 기록 속에서는 높은 문명을 향유했음이 확인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유적의 위치가 발견되고 있지 않은 고조선(古朝鮮, ? ? 기원전 108)과 한나라의 군현(기원전 108 ? 기원후 313) 시기를 제외하고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300m 이하의 높지 않은 산의 정상을 둘러싸거나 절벽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축조한 중소형의 통치성이 한국 고대의 500개 이상의 모든 지방행정단위에서 최소 1개 이상씩 발견되는데,이는 세계 대다수의 문명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유형이다.이 유형의 통치성은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후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서만 약 78개의도시국가가 경쟁하던 시기부터 활발하게 축조되기 시작하여 도시국가 통치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이후 삼국시대(313~668)~통일신라시대(668~892)에 통치성의 중요성은 약화되지 않았으며, 후삼국시대(892~936)에는 각 지역의 유력 호족들이 준도시국가 수준의 독자성을 갖고 자기 영역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통치성의 역할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918~1392) 전반기에도호족의 독자성은 계속 유지되었고, 통치성은 지방도시를 거점으로 한 호족 통치의 중심 역할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 중반기부터 이와 같은 통치성의 위상이 약화되는 현상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한다.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호족의 독자성이 부정되기 시작함에 따라 호족 통치의 상징이었던 통치성의 위상 역시 약화되었다. 1231년부터 1257년까지 7차에 걸쳐 일어난 몽골의 대규모 침입과 이에 대한 장기 항쟁 또한 중소규모의 중단기전에 적합하도록 축조된 통치성의 역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1350년대까지 이어진 원나라의 철저한 내정 간섭에 의해 통치성은 재건될 수없었다. 이후 한국의 역사는 작은 도시국가나 준도시국가의 형태로 분열되지 않은 중앙집권적 통일왕국을 이루며 근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통치성은 역사 속의 고적(古蹟)으로만 남게 되었다.둘째,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나 산 밑에 5m 안팎 높이의 낮은 성벽을 축조하고 해자와 같은 방어 시설을 설치하지 않아 강한 적의 공격에 방어력이 거의 없는 성곽이 전국 다수의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세계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다.

왕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이데올로기를 도시, 그 중에서 수도의 경관에 상징적으로표현하는 것은 전통시대의 모든 문명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다. 그리고 웅장하고 높은권위 건축물을 더욱 웅장하고 높게 보일 수 있도록 산이나 언덕 위, 아니면 거의 완전 평지에 건설하여 하늘=왕이란 2단계의 상징적 표현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대다수의 문명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고려의 수도 개성의 왕궁은 세계 대다수 문명권의 왕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웅장하거나 크지 않을뿐만 아니라 송악산(489) 밑에 건설되어 시각적으로 더욱 웅장하거나 크지 않게 보인다. 이는 웅장하고 큰 존재를 산이 대신하게 하는 하늘=산=왕이란 3단계의 상징 표현 방법을 개발하여 사용했기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세계 대다수의 문명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례다. 개성과 동일한 상징표현의 원리가 조선(朝鮮, 1392~1910)의 수도 서울에도 적용되었으며, 조선전기부터는 전국 모든고을의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다.이러한 3단계의 상징 표현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도시가 산 밑에 자리 잡아야 하며, 시각적인효과를 높이기 위해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최적지로 삼는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논리를 풍수라 하는데, 풍수가 도시 건설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적용된 것은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그런데 풍수가 적용되기에 가장 적합한 분지는 밖에서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높은 곳이 주변에 많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높은 방어력의 성곽을 쌓기에 불리한 지형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전투에서의 방어력보다는 하늘=산=왕이란 3단계의 상징 표현 방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방어에 분리한 분지 지형의 산줄기와 평지를 따라 높이 5m 안팎의 성벽을 건설하여 방어력이 거의 없는 도시의 성곽이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 다수의 지방도시에 건설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셋째, 험준한 높은 산지에 축조된 둘레 3,000m에서 최대 15,000m에 이르는 초대형 산성이 전국적으로 수십 개나 축조ㆍ운영되었는데, 이는 대규모 장기전에 가장 적합한 유형으로 세계 다른 문명권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현상이다.만주와 한반도 중북부 지역을 차지했던 고구려는 건국부터 멸망할 때가지 약 700년간 세계에서가장 거대한 제국 중의 하나였던 한(漢, 기원전 202~기원후 220)나라ㆍ수(隋, 581~618)나라ㆍ당(唐, 618~907)나라 등의 황하문명권, 기동력이 뛰어난 북방의 유목문명권과 군사적으로 대결하며국가를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거대한 제국의 대규모 침입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대규모 장기전에가장 적합한 초대형 산성을 수도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지방도시에도 수십 개나 축조ㆍ운영하였다.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대규모 침입이 예상되는 670년을 전후하여 현재의 남한산성 등 4~5개의 초대형 산성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평화적 관계가 지속되면서 초대형 산성은 더 이상 축조되지도, 유지되지도 않았다. 한국의역사에서 초대형 산성이 다시 등장한 것은 7차례에 걸쳐 몽골의 대규모 장기 침략이 있었던 1231년부터 1257년까지이다. 다만 이 시기의 초대형 산성은 주로 급하게 축조된 피난용이었기 때문에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후 더 이상 운영되지 못했다.조선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2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한 일본과의 대규모 장기전을 치렀다.

그리고 1627년과 1636년에는 각각 3만 명과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청(淸,1636~1912)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을 겪었으며, 1636년의 전쟁에서는 왕이 항복하여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대규모의 장기전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초대형 산성임을 분명하기인식하게 되었고, 전국에 총 21개 이상의 초대형 산성을 축조하여 250년 이상 체계적으로 관리ㆍ운영하면서 언제 있을지 모를 청나라와의 대규모 장기전에 대비하였다.한국의 역사는 서쪽의 황하문명권, 북쪽의 유목문명권, 동남쪽의 일본문명권과 2500년 이상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성곽이 축조ㆍ운영되었는데, 세계대다수의 문명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유형뿐만 아니라 쉽게 찾아보기 힘든 유형도 많았다.

따라서 한국에 남아 있는 다양한 성곽은 세계문명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특히 대규모 장기전에 적합한 21개 이상의 초대형 산성을 축조하여 250년 이상 체계적으로 관리ㆍ운영했던 조선의 경험은 세계문명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려면 압도적으로 힘이 강한 국가와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가 오랜 기간 동안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대규모 전쟁 가능성 역시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세계문명사 속에서 자주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세계적으로 그런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해발 약 500m의 높은 산지에 축조한 본성 둘레 약 8,000m의 초대형 산성인 남한산성은 조선의초대형 산성 중 가장 늦게까지 가장 체계적으로 관리ㆍ운영되었다.

또한 현재 대부분의 성곽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보존도 잘 되어 있어 한국의 초대형 산성 유적을 대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초대형 성곽은 세계적으로 많지만 남한산성과 같은 초대형 산성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유형이다. 이와 같은 여러 측면들이 충분히 고려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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